예수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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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이름

사도행전은 교회의 시작을 세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승천이후 제자들이 마가다락방에서 기도한 후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전함으로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하며 사도들 앞에 회개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 하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사도들을 통해서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다 함께 있으면서 모든 물건을 서로 나눠 쓰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나눠주고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집에서는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모습이 사도행전 2장 마지막 부분의 말씀입니다.

이와 같은 예루살렘교회에 새로운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31절에 의하면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40세의 사람이 성전 미문에서 베드로와 요한에 구걸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베드로와 요한에 의하여 고침 받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승천하신 이후 이 사건은 행3~4장을 걸쳐서 큰 변수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베드로와 요한에게 모여들었고 갈수록 예수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본문 45절에 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대제사장 안나스, 가야바, 요한, 알렉산더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 하였습니다.

안나스는 주후 6년부터 15년까지 대제사장을 맡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가야바는 안나스는 사위로 장인의 뒤를 이어 주후 16년부터 36년까지 대 제사장을 맡았습니다. 요한은 요나단이라고도 하는데 안나스의 장자로서 가야바의 뒤를 이어 주후 36년부터 37년까지 제사장을 맡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안나스는 퇴임한 이후에도 권력을 행사하였습니다. 당시에는 대제사장을 포함하여 산헤드린 공의회 회원들은 71명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실제 권력은 가야바가 대제사장인 동시에 산헤드린 공의회 의장직을 통해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21:23~‘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 때 재제사장들과 백성으리 장로들이 나아와 이르되 네가 무슨 권위로 이렇게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

사도들을 세워 놓고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고 질문 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10~’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1.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분 예수님이다.

11:1~어떤 병자-나사로는 예수님의 사랑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죽은 지 사흘이 지났을 때 무덤앞에 찾아가셔서 나사로야 나오라라는 말씀으로 살려주셨습니다.

본문의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사람이 건강해지고 갈수록 사람들이 예수를 따르는 상황을 눈여겨 살펴보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4:1~‘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라고 하였습니다. 2~4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에게 전함을 싫어하여 그들을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말씀을 듣는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특히 2절에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에게 전함을 싫어하여라고 하였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과 내세, 영과 천사의 존재를 부정하였습니다. 모세오경을 고수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부유층과 결탁된 사람들이었습니다. 현 상태를 옹호하는 보수주의 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불과 몇 일 전에는 여자 하인 앞에서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던 겁쟁이 베드로, 사람들 앞에서 맹세하고 저주하였던 배신자 베드로였습니다. 그러했던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산헤드린 공의회 앞에서 너희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고, 하나님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살리셨다고 선언하였습니다.

 

11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너희는 건축자들이 쓸데없다고 버린 돌과 같은 예수를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사 만민을 살리는 집 모퉁이의 머릿돌처럼 존귀하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초대교회 유스틴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로마 재판정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재판관이 물었습니다. ‘유스틴 네가 정말로 천국에 올라가리라고 상상하느냐?’.

유스틴이 대답합니다. ‘나는 상상이 아니라 확실히 믿습니다’.

 

2.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가 이 사람을 건강하게 하였다.

145~빌립이 예수님을 만난 후 나다나엘을 찾아 갔습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들이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예수니라’.

나다나엘이 빌립에게 질문하기를 나사렛에서 무슨 선 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와서 보라’. 나다나엘도 이렇게 예수를 믿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들이 예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말씀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파하고, 병자들을 고치는 일을 하였습니다. 8:14~베드로는 자신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었을 때 예수님께서 고쳐주신 일이 있었습니다.

9:20~‘열두해 동안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고 생각하고 예수의 겉옷 가를 만지니깨끗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나병환자, 중풍병자, 귀신들린 아이, 다리를 저는 사람, 맹인, 말 못하는 사람들을 고치시는 모습을 많이 보았습니다.

7:11~‘나인성과부의 독자 아들이 죽어 장래행렬이 지나갈 때 청년아 일어나라라는 말씀으로 청년을 다시 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베드로 일행은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사람을 예수의 이름으로 고치는 역사를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셨다고 선언하였습니다.

10‘~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나면서부터 걷지 못했던 사람, 40년 동안 누군가에 의하여 도움 받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사람이 예수 이름으로 고침을 받았습니다.

독일의 재상 비스마르크가 청년때 -친구와 사냥을 가게 되었는데 수렁에 빠졌습니다.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권총을 친구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는 시늉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친구는 죽을힘을 다해 나왔습니다. 나는 자네의 포기하려던 ....

그 예수님께서 우리를 고쳐주십니다. 우리 육체를, 우리 심령을, 우리 영혼을, 우리 가정을 고쳐주십니다.

 

3. 예수는 구원자이시다.

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

구원은 단순히 앉은뱅이가 걷게 된 것 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구원은 헬라어로 헤 쏘테리아는 육적구원 뿐만이 아니라 영원한 심판으로부터 구원하는 전 인격적인 구원을 의미합니다.

3: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 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4:6~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마호멧트는 40세까지 사막대상으로 다니다가 알라신의 계시를 받아 쿠란경을 기록하였다고 합니다. 유대교, 애굽 종교, 페르시아 종교등을 혼합하였습니다. 1부 다처주의를 옹호하였습니다. 자신도 12명의 아내를 두었습니다. 그들이 그리는 내세는 첩을 많이 두고 날마다 잔치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40세 된 구걸하던 거지는 구걸하다가 예수를 전하는 베드로와 요한을 만나 인생이 달라졌습니다. 구걸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도움만 있으면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 앞에 육신적인 것을 구걸하러 앉아 있습니까? 아니면 구원하신 주님께 감사하고자 앉아 있습니까? 중국의 교포들이 목사님들이 말씀을 선포할 때 싫어하는 말씀이 있다고 합니다. 어떤 말씀일까요? ‘축복 받아라라는 말씀이라고 합니다.

말할 수 없는 고난 속에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과 거리가 먼 것인가?’라는 갈등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예수의 이름 (4: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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